'알랭 드 보통'도 그렇고,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렇고,
  꼭 소설가뿐만 아니라 모든 예술가들은 그렇지만,

  일상에서 의미를 포착해내어 삶을 긍정하는 능력이 부러울 정도로 탁월하다.

  그런 능력은 타고 나는 것인지, 부단한 노력을 요하는 것인지... 아마도 둘 다 이겠지만, 끊임없이 연습을 하는데도, 쉽게 습득되지 않는 능력이다.

  어제는 옆 사람이 이런 말을 건넸다.

  "알다시피, 그래도 전에는 사랑이란 있다고 생각했었어.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누구에게고 이제는 서슴없이 이야기해. 사랑은 없다고..."

  그의 지난 삶을 그래도 잘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로써는 딱히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고, 그냥 들어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너는, 그래도 아직까지 운명에 도전해서 뭔가를 극복하려고 살고 있잖아. 그런점이 부럽기도 하고, 그래."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뭔지 모를 서글픔이 밀려왔다.

  글쎄...
  나 역시, 누구에게고 "사랑은 있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는 처지인 것은 같다. 때로는, 아니 자주 그 "사랑"이라고 불리우는 것들이 버겁고, 귀찮게 느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점점 내 삶에서 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어쩌면 그와 나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일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여짓껏 이렇게 어쩡정한 모습으로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남들이 보기에 도전적으로 보이는 바로 그것),
  그것이 무엇이 됐던지 간에, 쉽게 길들여지기 싫은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지난 일기장이나, 편지들을(오~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군..다 버렸어..) 뒤적여 보다보면 누구나 쉽게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내모습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다를 것이 없고,
  이것 저것을 읽고 배우면서 머리 속에 채우는 것 만큼, 또다른 이것 저것들은 가슴에서 떨어져 나간 것만 같은 느낌은 과연 나라는 존재에게 발전이란 것이 있는 것인지 의구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에, 그 무엇도 쉽게 속단할 수 없다는 것은 괴로운 사실이다.
  따라서, 쉽게 이젠 전의 내가 아니라거나, 새로운 내가 되었다거나 하는 것은 '의지'를 갖는 것의 차이일 뿐, 다른 무엇도 아닌 것이라고 지금의 나는 생각을 한다.

  때문에, 어떤 명확한 기준이 없는 지금의 나는, 그냥 살아갈 수 있을 뿐이고, 계속 나를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런지...

  삶을 들여다 보고, 마음을 들여다 보고, 또 너를 들여다 보고, 그를 들여다 보는 것이 지금 내가 살아가는 방식 중에 가장 올바른 선택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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