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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 위화, 백원담 역, 푸른숲


  이 소설은 장이모우 감독이 영화화하여 칸 영화제의 그랑프리를 차지한 <인생>이라는 영화의 원작 소설이다.
작가 '위화'는 <허삼관 매혈기>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져 있는 유명한 작가이며, 90년대 초반에 다수 소개되었던
중국문단의 한 작가로 이미 오래전에 우리에게 소개되었던 작가이기도 하다.

  사실,
  <허삼관 매혈기>를 읽은지도 오래되었고, 물론 지금도 그리 깊게 읽지 못하지만 그때는 그냥 흘러가듯 이야기를 따라 읽기만하던 때라 별다른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피를 팔 수밖에 없는 한 남자의 슬프다 못해 처연한 감정만이 오롯하게 가슴 안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사회주의라는 가깝지만 생경할 수밖에 없는 사회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과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그 말이 가지는 의미가 뭔지도 모르고 넘어갔던 "문화혁명"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젊은이들의 이야기인 '다이 호우잉'의 <사람아, 아 사람아>에 대한 감동이 훨씬 깊게 남아 있어서 그와는 다른 방식의 이야기를 펼치는 '위화'의 이야기가 너무 가볍게 느껴졌었는지도 모른다.

  뭐 여튼,
  <인생>은 언제나 그렇듯 메일로 도착한 한 인터넷서점의 서평 한 구절이 두 눈에 스며들어 앞을 흐리우는 느낌이 들기에 서점에 들어가 그 구절을 찾아 앞 뒤 한 두 페이지를 읽어본 후 바로 구매를 결정하게된 소설이었다.
다소 감상적이어서 창피하긴 하지만 그 구절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내 한평생도 이제 다 끝나가네요. 당신이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니, 나도 마음이 흡족해요. 나는 당신을 위해 두 아이를 낳았어요. 당신에 대한 보답인 셈이죠. 다음 생에서도 우리 같이 살아요."

  도대체 어떤 사연이 묻어 있길래, 여자는 죽어가면서도 저런 완전한 사랑의 마음을 표현할 수가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
  저렇게 일방적으로만 보이는 지고지순한 사랑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어떤 이야기가 펼쳐져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안에서 시련을 겪게될 인물들의 모습은 또 어떤 모습일까. 매우 궁금했다.

  결론적인 이야기기이긴 하나,
  이 소설의 원제목은 <人生(인생)>이 아니라 <活着(살아간다는 것)> 이다. 아마도 우리 정서에 맞게 적당히 고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물론 각고의 노력이 있었겠고, <살아간다는 것> 이렇게 제목을 썼더라면 소설로서의 매력이 좀 떨어졌을 수도 있었겠지만, 원제목 그대로 쓰는 것이 더 좋지 않았나 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살아간다"라고 말하지만, 이 말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나간다는 능동성이 담겨 있는 말이다. 허나, 과연 이렇게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적어도 나에게만은 삶을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운 일로 생각되고, 바쁘게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아! 또 하루 살았구나!"는 식의 삶.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닌 "살아지는 것"이라는 의미가 강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소설의 주인공이 결국 지향하고자 하는 바는 "나의 인생이 이러하였다"라는 식의 회한이 묻어나는 말이 아닌,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것이지.."정도의 깨달음이 묻어나는 것이므로 <活着(살아간다는 것)>이 더 정확한 의미일 것 같다는 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역시 서두가 길었지만, 간략한 줄거리를 말하자면,
  <인생>은 한 젊은이(안 이야기에서 청자가 되는)가 시골마을에 노래를 채록하기위해 머물다가 다른 시골사람들과는 달리 보이는 한 노인을 만나 그 노인의 인생사를 듣게 된다는 밖이야기와 그 노인이 이야기하는 자신의 인생사로 구성된 안 이야기로 구성된 액자식 소설이나, 총 5장으로 구성되어 한 장이 끝날 때쯤, 한번 씩 바깥이야기로 넘어와서 숨을 고르게 만들어주는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바깥 이야기는 안 이야기를 좀더 현실감있게 보이기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정도에서 그치므로 더는 이야기 할 것이 없고 본격적으로 안 이야기를 언급하자면,
  젊은 시절 잘나가던 가문의 재산만 믿고 헛된 삶을 살던 한 젊은 청년이 선조 대대로 내려오던 토지 중, 아버지가 젊은날의 방황으로 잃어버렸던 반 이상의 땅을 찾고자 노름을 하게되어 가문의 모든 토지를 빼았기게 되고 몰락한 가문에서 곁에 있던 가족들 마저 하나 둘 씩 잃게되고 결국에 혼자 남게 된다는 이야기가 중심이야기 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여기에서 그친다면, 무슨 인과응보니, 권선징악이니 하는 고전의 그것과 유사한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허나 , 문제는 이 주인공이 이미 젊은날에 그동안의 잘못을 깨달았고 반성하였으나 한번 넘어버린 운명의 문턱은 올라가기엔 높기만 하고 노력을 하면 할 수록 더 깊은 운명의 파고를 맞이하게 되는 데에서 고전의 그것들과 시사하는 바가 다르다. 또한 주인공 곁에는 무한한 대지의 모습 - 끝없이 포용적이고, 인내하고, 고요하게 울릴줄 아는 - 의 아내가 있는데 그녀의 그 무한한 사랑을 통해 인생을 악의 없이 원망하지 않고 살아가는,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지혜를 깨달아 간다는 것이 <인생>에서 말하고자 하는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가 아닐까 한다.

  나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끝없이 닥쳐오는 불행을 맞이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삼국유사의 <조신설화>가 계속 떠올랐다. 승려였던 조신이 헛된 욕망을 품어 어여쁜 낭자와 결혼을 하고 세속의 영화를 누리는데, 세속적 기쁨이 커져갈 수록 재산의 크기도 줄어가서 결국 거지가 되고 자식을 잃고, 아내와도 이별하기로 약속하다가 꿈에서 깨어났더니 머리가 하얗게 세어 있었더라는....

  주제가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헛된 욕망이나 운명 앞에 오만한 자에게 운명은 딱 그만큼의 댓가를 치르게 해주고 그런 어려움은 젊은 시절의 작은 차이에서 시작된다는 극히 일반적인 교훈.
  한낱, 100년을 살 수밖에 없는 하찮은 존재인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법은 오만하게 눈을 치뜨고 앞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닌,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겸손하고 순응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교훈.
  결국 인생을 살면서 내가 뿌린 씨앗의 열매는 내가 거두게 될 것이라는 교훈.

  사실, 인정하긴 싫지만 살면서 때때로 운명은 우리 앞에 이와 같은 교훈을 넌지시 제시했다가 다시 감추고는 한다..

  <인생>은 물론 살아남은 노인의 시각으로 자신의 가족사를 훑어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노인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아내의 모습은 가장 이상적인 삶의 모습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때로는 납득이 가지 않을 정도로 초탈한 모습을 보여주는 아내의 모습에 약간의 거부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말없이 곁에 있은 것만으로도 옆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고, 또 사랑에 대한 끝없는 신뢰를 보여주는 아내의 모습에, 만약 저런 사람이 곁에 있었다면 나또한 감화되지 않을 수 없겠다는 다소 이상적인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오래전에 영화도 보았었지만 '장이모우' 감독의 칸 그랑프리 수상 소식과 함께 계속적으로 수입되었던 <붉은 수수밭>, <귀주이야기>, <국두>, <홍등> 등의 영화와 함께 섞여 오로지 붉은 휘장과 붉은 깃발, 붉은 곡주 등의 기억만 가득한 영화라 매우 고전스럽게 뇌리속에 박혀있어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에 어둠의 경로를 탐색하기까지 한 소설...

  무척 잘 된 소설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옛날 이야기는 옛날 이야기대로의 진득한 맛이 있지 않은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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