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좋은 날
어제는 아버지 생신이었다.
뭔가를 해드릴 때면, 나이는 들어가지구 장가도 못가고 만날 돈으로 떼우기만 하는 듯 하여 죄송스런 마음이 한 편에 있지만, 그것도 언제나 잠시뿐, 곧 잊어버리고 잘 살아가기는 한다.
(능력없는 아들놈을 용서하세요..ㅜ.ㅜ)

뭐 여튼,
사회에 발을 내딛고, 내 힘으로 월급이란 걸 받기 시작한 후부터, 어버이날, 생신, 명절.. 이런 날이면 뭔가 하나 사서 안겨드리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챙겨드리고 있긴 하다..
(어쩔때 보면, 그럴려구 돈을 버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

첫 직장을 가졌을 때에는, 박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께 김치냉장고를 떡하니 사드렸다가, 6개월동안 카드값때문에 돌려막기를 해본 경험도 있고,(어렸을 때랍니다. 어렸을 때, 철모를 때 부렸던 객기...)
여자친구가 있었을 때에는, 예비 장모님, 장인어른의 생신까지 챙겨드리느라, (어찌된 영문인지 우리 부모님과 꼭 한 분은 겹치게 되어있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라면으로만 끼니를 떼우던 그런 시절도 있었다..

물론,
'얼마나 대단한 것을 해드렸길래 호들값을 떠냐'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겠지만,
나,
그때 어렸다.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솔직히 나먹고 죽을 것도 없었다.. 그런데, 오지랖이 또 열두 폭이라...고생을 사서 한거지...

암튼,
지금은 그런 분수에 넘치는 객기는 사라졌고, 때마다 구색을 맞춰드리려고만 노력하는 편인데다, 동생도 취직을 하여 반 반씩 부담을 하는고로 한결 수월해졌다. 거기에다가 돈 쓸일을 극도로 제한시켜버린 고등학교 교사라는 직업.. 베리 나이스...

여튼, 우리 아버지는 매우 신세대이고 싶어하시는 분으로 예전 '코요테'시절의 '신지'의 외모에 대해 대학생인 자식들과 격론을 벌이실 정도였고,
'렉시'가  '애송이'라는 노래를 들고 데뷔하였을 땐, 애창곡을 '애송이'로 선택하시는 과감함에다가, 핸드폰 노래방에 동영상을 다운로드 하셔서 연습을 하는 실천력까지 보여주셔서 요금을 대신 내드리는 아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신 적도 있는 분이시다.

때문에, 아버지의 생신 선물은 날로 첨단을 달려,
'파나소닉 물세척 3중전기면도기' 시작하여, '산요 Xacti 디지털 캠코더(삼각대, 2G 메모리 포함)'를 거쳐 이번에는 'LG 17인치 TFT 모니터'로 진화하여 왔다.
과연 내년에는 무엇을 필요로 하실지...

여튼,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 셋이서 오붓하게 외식을 즐기는 단란한 시간,
더군다나 반주를 곁들인 흥겨운 분위기에 얼굴이 약간 붉어지신 아버지가
'아버지 건강하시구. 오래사셔야 되요.' 라는 나의 말에
'그래! 고마워!' 라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애써 성의없는 척 말씀하실 때엔 외람되지만 '귀여우시기'까지 하시다..
그런 아버지의 생신이 어제였다..

아버지, 조금만 더 오래, 건강하게 곁에 있어주세요..


2. 나쁜 날
어제가 우리 새끼들 수능 D-400일이었다.
뭐 사실,
고2 학생들이 기껏 신경을 써봤자 하루 반짝,
'얼마 안남았네~~', '고3이네 진짜! 우왕~~' 하고 마는 정도이지만,

사려깊으신 우리 부장님께서는
앞면에 대학교 로고가 가득 새겨진 종이를 준비하셔서 뒷면에다가 '수능일을 앞둔 나에게'라는 타임캡슐식 편지를 써서 걷어달라고 하셨다.
그럼 그 편지들을 내년 담임에게 전달하여 수능 전날 학생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생각.

음.. 이유야 어쨌건, 아이들을 위해 그런 생각을 하셨단 말이지...
나는 무슨 생각을 했나...

사실, 올해 전반적인 컨디션이 좋지 못하여, 전투력이 그리 높지 않은 저레벨 상태로 지나온지라 우리 새끼들에게 못해준 것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미안한 생각도 없지는 않다.

학년 초에는 이리저리 녀석들과 코드가 맞지를 않아서 헤매기도 했고, 서투른 모습도 보여서
'우리 담임 선생님 빨리 여자친구가 생기셔야 할텐데, 헤어지고 난 다음에 변하셨어.' 라는 소리까지 듣는 정말 안타까운 상황까지 발생하였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정말이다. 믿어달라.)

여튼,
몇 개월을 같이 보내면서,
이제야 톱니들이 서로 닳아가며 이가 맞아, 녀석들도 알것 같고, 녀석들도 나를 알고 하는 사이가 되어
수업시간에 들어가면
'우리는 어쩔수 없는 애증의 관계야..그치?', '네~'
정도의 대화가 오고가는 사이가 되었다.

항상 이만큼 와야, 이만큼의 시간동안 헛다리를 짚어야 그나마 담임다워지는 건지, 교사다워지는 건지.
욕심만 많고, 능력은 개뿔 없는 그런 인간이 나인지, 또 조금 고민이 된다...

하지만,
아직 2학기 중간고사도 시작되지 않았으니까. 시간은 있는 거지...
다시 힘을 내야지...


3. 이상한 날
4월 9일날 그런 대화를 나눴었다.
'아 그래? 그럼 내가 6개월만 기다려줄게. 다른 남자 한 번 만나봐.'
'... 정.. 말?'

핑계라면 핑계일 수 있고,
오만이라면 오만일 수 있고,
객기라면 객기일 수도 있고,
맘이 떠났었다면 그랬을 수도 있는

굉장히 위험한 저 발언을 던질 때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이 있다고 말할 줄은 몰랐다.

좀 지난 뒤에 생각해보니,
내가 붙잡는지, 그냥 보내는지, 내가 사랑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확인해볼려고 없는 이야기를 꾸며냈을 수도 있겠다는 뒤늦은 후회가 되기도 했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둘을 위해 적절한 시기였다고, 잘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저런 시험이라도 하여서 관계를 끝맺을 수 있는 그 사람이 용기가 있는 사람이었던 거지.
어차피 안되었을 것을 시간만 늦추어가면서 붙잡고 있었던 나는 어리석고 못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여튼,
핑곈지, 오만인지, 객기인지 모를 그 기다리겠다던 '6개월'이라는 시간이 바로 오늘로써 쫑이다.
사실,
까먹고 있었는데, 수업시간에 애들이
'오늘이 한글날이에요. 자습해요~'라고 하길래.
달력을 바라보니 10월 9일이었고, 뭔가 있는 듯하여 가만히 보니 오늘이 10월 9일. 6개월이었다.

내 사정을 잘 아는 학교 선생님에게,
'오늘이 10월 9일이야, 6개월 되는 날, 기록경신이다.' 그랬더니
'뭐야, 그럼 오늘 12시 안에 돌아오면 다시 시작하는 거야.'
'하하하. 긍가?'
'힘들다고봐.. 내가 보기엔...' 이런다.

당연히,
'6개월만 기다릴게'라는 말 속에는 그사람에 대한 끈을 꽉 움켜쥐고 놓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겠지만,
사실,
나는 그 끈을 진작에 놓아버렸다.
그리고, 죄책감을 덜고자 그 역시 놓아버렸길 바랐다.
그 당시야, 정말 그런 마음이었을 수 있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6개월만 기다릴게.'라는 말은 '이제 그만 놓아줄게' 혹은, '이제 그만 끝내자'의 다른 표현이었고, 해서는 안될 말이었던 거였다.
비겁하게, 이별을 말하면서 이유를 떠미는 치사한 행동이었던 거였다.

여튼, 오늘이 그날이었다는 거다.
사실, 한 편으로는 급압박할지 모르는 '미련'과 '씁쓸함'을 걱정했던 적도 있었고, 또 한편으로는 내 생에 '싱글'로 보낸 최장시간을 기록하게 되는 날이어서 10년동안 바라마지 않았던 감격의 순간이기도 했지만,
무지 담담했다.
하루 종일 바뻐서 시간이 어찌 지나가는 줄도 몰랐다 사실..

암튼,
이제 새롭게 쓰여지는 내 '싱글'의 궤적들이 부디 나에게 도움이 되는 시간들로만 충만하기를 바라며,
그러기 위해선 더 많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며,
오늘의 이 무덤덤함을 지난 그 사람과의 2년의 시간 안에 있는 행복했던 시간들에 바치고자 한다.

고마웠습니다. 좋은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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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08/10/13 12:26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 차이와결여 2008/10/13 19:26  address  modify / delete

      '님'의 말씀처럼 어찌보면 아주 사적이고도 개인적인 생각이었을 뿐인데도, 관심있게 보아주시고 답글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로서도 어떤 쪽으로 결론 지어질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서두요.. 결과야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어차피 만나고 헤어진 다음의 일일뿐인데요...
      다음에 안그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ㅎㅎㅎ


      요새 날씨가 갑자기 썰렁해져서 주위에 감기 환자가 많아졌든데요? 감기 조심하세요~~